총몽의 모티브들


흠. 다시 '총몽'입니다. 유행을 타지않는, 팬시상품으로서의 상업성을 타지 않는, 인기에 영합한 줄거리 억지 엿가락 늘리기에 빠지지 않는, 그러고도 항상 읽은 이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진정한 당 장르의 명작들을 꼽아본다면, SF에서는 당연히 이 작품, '총몽'이 들 것입니다. 물론 유혈낭자한 일부 씬들과 귀엽지 않은 그림체, 어려운 대사, 광기로 가득찬 '애정이 안가는' 등장인물들의 난무, 게다가 덧붙여서 마지막 파트에서의 지나치게 빠른 내용전개 등은 여러 독자들로 하여금 이 작품의 진가를 애써 외면하게 만들 수 밖에 없었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총몽'을 참 좋아하는 저로서는 이리 자판을 꺼내게 되는군요. 이번 글에서는 '총몽'의 모티브가 된(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몇 가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려 합니다. 아마도 '총몽' 팬들 이외에는 별로 재미 없는 글이 되겠군요...

본 글에서 이야기하는 모티브들이라는 것은, 반드시 작가가 이것을 보고 그러한 구상을 했을 것이라는 '까발리기'가 아니라, 그러한 구상을 볼 수 있는 다른 작품들을 제시함으로써 그 구상, 그 주제의 방향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그 해당 작품들을 직접 접해보고 그 주제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히고. 그러니까, 결국은 더 '총몽'을 잘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이 되는 셈입니다. 또 알고 보면 실제로도 작가가 이런 것들에서 그 구상을 찾았을지도 모르지요... 흠. 뭐 여하튼 한번 자판을 두들겨 볼까요?


 

차례

1. 쟈렘과 고철도시 - 메트로폴리스

2. 싸이보그의 정체성 - 블레이드 런너

3. 황야의 폭주 도적단 - 매드 맥스 2, 3

4. 하늘의 블루가 나를 덮친다 - 프로그레시브 록

5. 이드와 소녀 조수 - 블랙 잭

6. 팩토리라는 권력 - 맥스 헤드룸

7. 우리를 위해 희생해줘! - 성경


 

1. 쟈렘과 고철도시 - 메트로폴리스

프리츠 랑이라는 독일감독의 영원한 SF고전 "메트로폴리스"라는 흑백영화가 있습니다. 표현주의 기조를 따라가며, 나치식의 전체주의를 예고하는, 하지만 무엇보다 이후 많은 SF물의 근간이 되는 작품이지요. 간단한 소개 올립니다.

메트로폴리스의 세계는 두가지로 이루어졌습니다. 지상도시와 지하도시. 지상도시는 새가 지저귀고 차들이 하늘을 날라다니며 고층빌딩과 자연공원이 잘 버무려진 현대식 낙원상입니다. 그에 비하여 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지하도시에서는 열심히 노동자들이 격무에 시달리며 비인간적인 노동을 착취당하고 있지요. 그런데 지하도시의 처녀 마리아와 지상도시 지도자의 아들(헛! 이름을 까먹었군요)이 우연하게 만나고, 마리아를 따라서 그 청년이 지하도시의 실상을 알게되자 지상도시의 보수세력들이 마리아와 똑같은 복제 로봇을 만들어서 둘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지하 노동자들을 파업으로 선동하지만(그 파업을 구실삼아서 지하노동자들을 철저히 탄압해버리려는 심산이지요), 결국 그 음모는 밝혀지고 지상세계와 지하세계는 화해를 한다라는 내용입니다.

이미 눈치 체셨겠지요, 총몽 매니아 여러분들. 낙원으로서의 지상도시와 노동착취의 지하, 이것은 곧바로 쟈렘과 고철도시로 치환될 수 있습니다. 덧붙여 지상지하세계를 이으려는 한 처녀, 마리아라. 상당히 성서적인 느낌이 드는군요, 마치 총몽의 '가리'처럼. 그러고 보니 여주인공을 방해하는 복제인간이 나오는 것도 같군요. 여하튼 핵심은 그 고철도시와 쟈렘의 이분법입니다. 착취와 피착취, 그런데 그 착취는 악의 음모라기 보다는 이미 정해진 질서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피착취계급의 봉기를 막기 위하여 취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낙원세계'를 안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요. 막연한 동경만이 있고 실상을 모른다면 봉기를 할 역량을 키우기가 훨씬 힘드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착취가 너무나 극에 달하면 결국 바자크같은 급진세력들이 발생하고 예정된 비극을 향해서 출발합니다. 이 방향의 키워드는 '억압, 착취, 그리고 지배의 구조'입니다.


 

2. 싸이보그의 정체성 - 블레이드 런너

단행본 2권에서 가리가 유고를 생각하며 높은 곳에 앉아 바라보는 고철도시의 전경 -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이, 어디서 이미 본 장면입니다. 블레이드 런너 첫 장면이지요(그 뭐냐, 자동차가 공업지역인듯한 곳 위로 날아가고, 불기둥이 한번 치솟는 장면). 원래 블레이드 런너 이후에 사이버펑크 계열 SF가 다 그렇듯이, 총몽도 블레이드 런너의 '마수'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당신은 스스로에게 이 테스트를 해본 적이 있나요?" 블레이드 런너에서 레이첼은 데카드에게 물어봅니다. 레이첼은 자기가 알고보니 안드로이드였고, 그간의 기억은 모두 조작된 것임을 'Voight-Kamff 감정이입 테스트'로 알게 된 후였죠. 흠. 데커드는 대답을 못합니다.

과연 자신의 머리속을 들여다보면 어떨까요. 그 안에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던 '뇌'가 없다면.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져버린다면. 과연 인간을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요? 여기서 또다시 블레이드 런너와 총몽은 '프리스'와 '닥터 노바(혹은 네스터)'의 입으로 같은 해답을 제시합니다. "Cogito, ergo sum."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멋지군요, 그 태연함이란. 총몽에서는 계속하여서 싸이버 인체기관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서, 인간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것은 바로 뇌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습니다. 죽음은 뇌가 죽는 때를 가리킬 뿐이었죠. 그 전제에 독자들은 모두 동화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드를 쟈렘인, 즉 '칩두뇌인'으로 밝혀지게 만들면서 작가는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결국, 인간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꿈'입니다. 그 광기의 노바 박사 마저도 사실은 꿈이 있었다니('이 순간을 영원히' - 그것은 엔트로피 법칙의 초월이며, 업의 극복입니다)... 그 꿈이 모터볼의 황제가 되는 것이든, 쟈렘을 위에서 보고 싶다는 것이든, 거대한 푸르름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것이든, 그냥 소박하게 좋아하는 사람과 살아가는 것이든 간에 말입니다. 블레이드 런너에서 말하는 인간의 조건은 그에 비해서 '생에의 의지'이지요(로이 베티는 그 생에의 의지마저 극복하고 데카드를 '용서'함으로 오히려 숭고한자가 되어버리죠). 그래서 블레이드 런너가 비장함과 처절함에 있어서는 한 수 위이고, 총몽이 의외의 서정성과 '따뜻함'에서는 한 수 위인 것 같습니다. 이번의 키워드는 '인간의 조건'입니다.


3. 황야의 폭주 도적단 - 매드맥스 2, 3

바-자크의 모티브는 누가 보더라도 매드맥스 2,3 편입니다. 폭주족들이 달려오는 구도라든지, 매커닉들의 디자인이라든지 하는 하나하나가 매드맥스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것을 피할 수가 없군요. 황폐한 미래 사회에서, 사막과 몰락한 도시의 폐허 속에서 활동하는 그들은 거칠게 삽니다. 게다가 어떠한 공통의 목적이 있기도, 혹은 단지 싸움이 좋아서 모이기도 합니다. 혹은 끌려왔다가 같이 합류하게 되기도 하고. 하지만 한가지, 그들은 확실히 그곳의 주인입니다. 고철도시의 소시민들처럼 쟈렘의 착취에 길들여진 일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 나름의 공동체를 구성하여 나름대로의 세계재건에 관한 이상을 품고 살아갑니다. 티나 터너를 덴과 비교하는 것은 좀 그렇지만, 그 리더로서의 카리스마 덕에 그 집단을 유지할 수가 있는 셈이죠.

원래 역사상으로도 해적이라는 집단은 당시의 귀족사회보다 훨씬 민주적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귀족사회는 해적들을 범죄인으로 매도하고 악마주의의 이름을 마음대로 갖다 붙이고 온갖 추악한 이미지들을 붙여대었지만, 실상은 그들 귀족들이 민중의 피를 더 뽑아먹는 세상이었습니다. 지배계급의 철저한 착취와 피지배계급의 제도화된 순종(다행히도 결국 폭발했지만), 그 속에서 부를 획득한 귀족들의 상선을 공격해서 살던 해적들은? 선장이라는 지도자 하에 모두가 공평하게, 남녀노소, 흑백 차별 없이 일종의 원시공산주의, 아테네 민주주의 사회를 이루어 나갔다고 합니다. '도적때'의 낭만, 그것이 동서를 막론하고 민중문학에 남아있는 이유지요.

여하튼, 그런 '도적집단'적인 미래상, 그것을 더 보고 싶다면 매드맥스 시리즈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키워드는 '도적단의 내부모습'입니다.


4. 하늘의 블루가 나를 덮친다 - 프로그레시브 록

실제로 작중에 Yes의 Big Generator가 그대로 실리는가 하면, 케이아스가 노래하는 곡은 알란 파슨스의 노래이며, 또한 라디오 케이아스 라는 로저 워터스(핑크 플로이드 출신) 솔로 앨범의 이름도 그대로 원용됩니다. 아, 이 작가는 프로그레시브 록을 좀 듣는구나, 하는 말이 절로 나올수 밖에요.

프로그레시브 록 특유의 넓은 사운드 스펙트럼, 깊고 시적인 감수성, 그리고 문명비판과 명상의 분위기는 총몽 작품 전반에 흐르는 차가운 금속성 광기와 묘한 줄달리기를 합니다. 흠. 실제로 그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감상하시면 더욱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여하튼, 이 작품을 가로지르고 있는 두 감성의 축 가운데 하나가 차가운 인더스트리얼적인 기계 괴성이라면, 다른 축은 바로 알란 파슨스 식의 감성넘치는 명상적 프로그레시브 록입니다. 이 모티브가 있기에 총몽은 차갑고 냉소적인 미래 엽기 공포물이 아닌, 진지한 인간에 관한 질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키워드: '명상'.


5. 이드와 소녀 조수 - 블랙잭

이드는 혹시 로리타 콤플렉스가 아닐까요. 처음 가리의 머리를 발견하고 기뻐하던 그 모습을 보면... 같이 일하는 동료로 있던 그 아저씨로서는 도저히 성미가 안차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가리를 '헌터'로서가 아니라, '소녀'로서 키우려 하는 모습이란... 거의 프린세스 메이커 감이군요. 여하튼 솜씨좋은 의사와 그가 '만들어낸' 소녀조수의 구도는 데스카 오사무의 역작 '블랙잭'에서 이미 선보였습니다. 블랙잭에서도 블랙잭은 뇌와 일부 신체기관들 위에 인공으로 골격을 입히고 피부를 이식, 피노코를 '만들어'냅니다. 하필이면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아이를 꼬마 여자애 몸으로. 뭐 여하튼 피노코는 블랙잭을 이성의 대상으로, 혹은 아버지로 바라보며 열심히 조수노릇을 하지요.

우리의 로리콘 이드 역시 가리에게 열심히 돈벌어서 '이쁜 여자몸'을 붙여주려 노력합니다. 드레스도 사고. 그런데 결국 소녀로서 의사조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전사로서 헌터 조수를 하게 되지요. 아, 얄궂어라. 뭐 그래도 가리가 이드를 보는 눈은 이성('아, 나를 더 해부해줘요'(케이아스가 갈리를 소생시킬때) - 도대체 이런 낮뜨거운 대사를...) 내지 오빠의 눈이니, 뭐 어느정도 만족할 만 하지.

이드의 입장을 생각해봅시다. 능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결국 반체제범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쓰레기장에 버려지고, 결국 고철도시로 흘러 들어와서 새로운 인생을 홀홀단신으로 시작한 그입니다. 무언가 애착을 가질 수 있는 것, '가족'을 바랄 것입니다. 가족. 참 좋은 말이죠. 더 이상 이드는 고독할 필요가 없습니다.

흠. 기억을 지운 후, 고철도시를 벗어나서 살고 있을 때도 다른 소녀 사이보그를 조수로 데리고 진료소를 차리고 있더군요. 역시나 로리타 콤플렉스인가 봅니다. 키워드는 '가족'입니다.


6. 팩토리라는 권력 - 맥스 헤드룸 (Max Headroom)

80년대의 진정한 컬트드라마, 맥스 헤드룸을 기억하십니까? 한국(MBC)에서 방영했을때는 1기 시리즈의 일부만 보여주다가 조기종영했지만 말입니다(80년대에 가상현실, 싸이버 인간, 멍청한 대중과 미디어 권력같은 개념들이 일반 시청자에게 얼마나 먹혀들어 갔겠습니까? 게다가 당시 경쟁 상대가 KBS의 '돌아온 제5전선'이었으니 말입니다). 누가 저에게 '싸이버펑크를 알고싶어요' 라고 물어보면 가장 먼저 권하는 것이 바로 '맥스 헤드룸'입니다. 불행히도 비디오 출시도 안되었지만 말입니다. 어떻게 다시 구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뭐 여하튼, 맥스 헤드룸의 세계관은 사이보그라는 소재를 안썼을 뿐, '고철도시'의 풍경과 상당히 흡사합니다. 칩으로 되어있는 화폐, 브라운관이 여기저기 모니터로 걸려있는 너저분한 슬럼가, 곳곳에 돌출된 파이프들, 무엇보다 '싸이버'화된 펑크족들. 여기에 대중들을 혹세무마 시키기 위한 스포츠라는 개념도 등장하지요. '레이킹'이라는 이 스포츠는 스케이트보디에 엔진을 달아서 격투를 하듯이 거칠게 공을 상대의 골문에 넣는 스포츠입니다. 스피드, 격투, 대중 유린. '모터볼'의 선조로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런저런 소품들이 아닌, '권력의 작용방식'입니다. 단순한 폭압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닌, '자율'의 힘을 이용한 고도의 정치. 쟈렘의 산하기관 팩토리는 화력이라는 월등한 무기를 가짐에도 범죄자들을 직접 심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직접 나설 경우 '그들'에 대한 도시 주민들의 이질감이 확대되고, 거부감의 연대로 뭉치게 될테니까요. 그대신, 현상금을 겁니다. 그리고 도시 주민들중 강한자들이 그것을 처리하도록 하게 합니다. 그 결과, 아주 자유방임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도시문화가 생겨나지요. 맥스 헤드룸의 세계에서는 비록 강력한 공안경찰이 있기는 하지만, 자율에 의한 무정부주의적 도시양상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맥락입니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대중의 관심을 비정치적인 것으로 돌려라'도 있겠지요. 오락에만 열중한 대중은 자신들의 처지를 한순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억압하는 그 근본을 찾아나서고 개혁할 생각을 잊어버립니다. 스포츠, 오락프로그램, 뭐든(전두환이 프로야구를 만든 이유입니다).

효과적인 인간관리, 그것은 강력한 제도, 자율, 그리고 망각의 3박자입니다. 이 3가지가 이번의 키워드이겠군요.


7. 우리를 위해 희생해줘! - 성경

다른 설명이 필요없으리라 봅니다. 성경귀절 까지도 인용해서 작가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성서적 모티브를 끌어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산양은 모두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제단으로 향한다' - 너무나 가리에게 어울리는 표현 아닙니까.

고대종교에는 이상하게도 '내 죄를 남에게 대신 속죄하게 한다'라는 풍습이 전세계적으로 퍼져있습니다. 인당수의 심청이라든지, 멕시코의 인간제물이라든지, 기독교의 희생양 - 나아가서 그리스도 이야기라든지. 인과 관계라는 것을 막 깨닳기 시작한 고대인들은 이런 생각과정을 하기 시작합니다: 뭐가 잘 안풀린다 - 인간을 초월한 어떤 존재(신, 악마, 귀신...)가 어떤 이유로 분노한 것이다 - 따라서 우리는 거기에 대한 대가를 그에게 치뤄야 한다. 초월자들을 분노시키는 것은 스스로들의 모자람(악행, 불효, 불충,...뭐든)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 대가는 가능한한 귀중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생명'을 공양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신이 스스로 죽기에는 아깝습니다. 그래서 꽤 그럴싸한 변명을 만들어냅니다. 죄많은 나를 공야해봐야 달라질게 없다 - 죄없는 깨끗한 존재를 공양해야 초월자도 좋아하고, 우리도 훨씬 비싼 '댓가'를 치룬 것이 된다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발전하면, 한 집단이 하나의 대표자를 (대부분 강제로) 내세워 '숭고한 희생'을 종용합니다 (파시즘의 시작이지요).

희생양 모티브의 극치를 달리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가 그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도 가능하면 살고 싶었을 것이지만, 죄많은 인간들이 그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그가 그것을 고민 끝에 받아들였습니다. '총몽'에서는 이러한 장면이 두 번 연출됩니다. 첫째는 고철도시의 주민들이 가리를 광전사 자팡에게 넘겨주는 장면인데, 여기서 가리는 결국은 희생을 거부하고 '악마'과 싸워서 이깁니다. 두 번째는 맨 마지막부분에서 자렘이 추락위기에 있을 때 스스로를 인간접착제로 변화시켜서 세상을 구하는 장면입니다. 10년동안 세상을 둘러보고 인간적으로 더욱 성장한 가리는 '파멸'이라는 초월자 앞에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고, '꽃'이 됩니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는 약속된 부활까지도. '성녀'에게 어울리는 결말이겠지요. 키워드는 '희생'과 '부활'입니다.


어라... 처음 글을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쓰다보니 여기 즈음해서 막히는군요. 뭐 나중에 또 생각해서 또 쓰지요. '총몽' 팬 여러분들이 다시금 책을 펼쳐보게 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다른 총몽 팬들의 총몽에 관한 이야기들이 올라오면 좋겠군요. (솔직히 지부리, 에반게리온, 그리고 공각기동대 이야기는 이제는 좀 지칩니다)

- 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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